이 책의 읽기 전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유명하고 아무래도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나해한 이야기들, 국제상을 받을 만큼
의미가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항간에 "야설작가"라는 평이 있지만 딱히 그런 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문학에서도 섹스는 어느정도 중요한 이야기라고 여기기 때문.
그런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고 그의 이미지가 180도 달라졌다.
픽션이 아니라 본인의 이야기를 적어서 그런 걸까. 일상적인 이야기가 많다.
기억에 남는 건, 자신이 시저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편인데 일본의 샐러드는 별로 맛이 없다고,
재료를 정량으로 쓰지 않고 넘치게 넣기 때문에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저스 샐러드를 만들려면 '아가씨'처럼 싱싱하고 신선한 상추가 필요하다고 쓰여있다.
'아가씨처럼 싱싱하고 신선한 상추'라는 표현을 보고 나는 질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을 '싱싱'하다고 표현하는 건, 여성이 채소처럼 남성의 입에 들어가기 위한 존재라는 것인데
이런 더러운 유머와 표현은 내가 딱 질색하는 표현이다.
이 문장도 첫부분에 나와서 좀 놀랐는데, 그래도 이 한 문장을 갖고 그를 가볍게 판단하진 말자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젊을 땐 화낼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화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오해'할 수 있다는 객관화를 하면서 차분히 마음을 다스린다든가,
시시껄렁한 자기 일상을 적어놓으면서 웃으며 넘길 수 있거나, 다른 이들의 인생사에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뒷장을 넘겨도 나오는 여자 얘기들이 식겁할만 했고
그를 잘못 판단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코르셋을 외치며 남녀평등을 외치는 2020년에
읽을만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이 책을 1992년도쯤 읽었다면, 위트있는 남자라면서
웃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 역시 소름 끼친다.
언젠가 본인이 사우나를 간 적이 있는데, 남자들이 전부 우락부락 근육맨이라서 자신의 몸은
볼품없어 보였다고 생각했고,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면서 예시를 들어놓았는데
'만약 아타미 온천 어딘가의 여관에서 세계 슈퍼모델 워크숍 같은 것이 열리고 그 근방의 일본인
여성이 아무것도 모른 채 대형사우나에 들어갔다고 가정해보자. 주위 사람 전부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알몸의 슈퍼모델이라면 그건 꽤 무서운 체험이지 않을까.' 라고 쓰여있었다.
그러면서 옆장에는 두 여자의 발가벗은 몸이 그려져 있고, 가슴을 가리고 있지만 유두가 가려지지 않은 채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있었는데. 이 그림과 글을 보고 진짜 헛구엿질이 나오면서 이런 사상을 가진
작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는데 빅엿을, 똥을 날려주고 싶었다.
그의 글에선 여성은 '신선'하거나 '슈퍼모델'이거나 '평범한 몸매'로 그려지고 있다. 여성을 사람으로
표현한 글은 하나도 없었고, 이 점에 상당히 실망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사람임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남성의 눈에 궁금한 호기심의 영역. 그러니깐, 한마디로 성적 대성화 표현이 없인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
만일 하루키가 자신의 명성에 기가 눌렸던 독자들을 위해, 그들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쓴 글이라면
반절은 성공했다. 그를 위대한 작가로 보지 않으니까. 딱, 어린 여자 밝히는 빻은 남자로 밖에 안 보인다.
채소의 기분이라는 얘기도, 일본의 순무 옛날 이야기를 인용했는데
'한남자가 어디 가는 길에 성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밭에 들어가 순무에 구멍을 뚫어
볼일을 해결하고 떠났다. 아침에 밭 주인딸이 구멍 뚫린 순무를 발견해 먹어버리고서 임신을 한다.
부모는 혼을 냈지만 태어난 아기가 귀여워서 잘지낸다. 그러다 순무와 볼일을 봤던 그 남자가
거길 지나가다가 자신의 볼일을 본 순무를 먹고 애를 낳은 여자의 사연을 알게 된다. 그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잘 산다. ' 라는 이야기인데, 순무의 기분은 상관을 안했다는 것이다.
순무의 기분이라니. 애초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순무에 그짓을 해놓고, 그것을 먹어서 임신해버린
미혼모의 기분은 생각 안 하나?ㅋㅋㅋㅋ채소의 기분이라고 표현할 게 아니라 '채소와 여자의 기분'이라고
해야될 것이다. 밭 주인 딸은, 밭이 어차피 부모님 밭이니깐 순무를 먹을 수도 있는 것이고, 왜 애초에
남자는 성욕을 못참는 건지. 남의 집 밭 순무에 사정을 해버릴 만큼의 짐승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지?
나는 진짜 도무지 이 전설의 이야기가 이해도 안되고 그저 성희롱적인 이야기 같고, 내가 그 부인이라면
남자를 고소했을 것이고. ^^ '남자는 성욕을 참지 못해~'같은 무논리를 여자들에게 그럴싸하게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성욕은 남자에게만 있을까요? 과연? 여자에게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하루키에게 너무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란 이유만으로, 좀더 색다른 생각을, 그리고
진보된 '의견'을 내놓을 줄 알았으니까. 그치만 이것도 단단한 착각이다. 문학판에 있는 남자들이야말로
'여성관'에 있어선 퇴화됐고, '남녀평등'따위 관심이 없다. 그저 '여자처럼 싱싱한 술'을 찾아서 마시며,
단순한 욕망의 분출같은 글을 싸지를 뿐이다. 이쯤되니 내가 너무 화가 난거같다 ㅋㅋㅋ
아무튼 그의 소설에선, 섹스얘기가 많고 섹스를 통해 깨닫는 장면도 많은데
이 책을 보니 왜 많은 지 알거같다.
그도 그저. '여자는 남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성별이지~' 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남자일 뿐이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콩깍지가 씌인 주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해주자.
시꺼먼 속내를 읽어보면, 어느정도 그 콩깍지가 벗겨질 지도 모른다.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리뷰] 씁쓸하면서 현실적이고도 여운 남는 이야기들,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0) | 2020.06.15 |
---|---|
[책리뷰] 죽을 때까지 두고두고 읽고 싶은 인생책. 진주 귀고리 소녀 - 트레이시 슈발리에 (0) | 2020.06.14 |
[책리뷰]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마법을 부리려면 저항력을 이겨내야 된다. 문제는 저항력이다 - 박경숙 (0) | 2020.06.12 |
[책리뷰] 새사람이 되고 싶다면, 습관이 중요하다/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 사사키 후미오 (0) | 2020.06.11 |
[책리뷰/인문학] 끝까지 안읽어도 재밌었다면 좋은 독서다, 이동진 독서법 - 이동진 (0) | 2020.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