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서른 셋 나이차에도 사랑했던 그들의 실화. 포옹 - 필립 빌랭
필립 빌랭 작가를 알게 된 작품 <포옹>. 깅장한 설명대로 이 책은 프랑스의 유명한 여성작가 아니 에르노의 33세 연하 연인이었던 그가 그녀와 5년간 나누었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이다. 강렬한 데뷔로 이목을 집중하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표현하는데 맞다. 두 작가에게 관심이 일절 없는 내게도 이러한 배경은 굉장한 충격을 주었으니깐.
솔직히 나이차에 놀랐지만 가장 놀란 점은 그 사랑이 특별할 게 없었단 것이다. 사랑은 세계 공통으로 똑같고 그 이야기는 불보듯 뻔하듯 <포옹>에 담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도 특별한 차이는 없다. 놀라운 나이차를 빼면 그저 두 남녀가 불타듯 연애했다가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책의 얇디 얇은 분량이 이해가 되고, 내가 했던 사랑에 대입할 만큼 공감도 간다.
필립 빌랭은 아버지가 끼고 살았던 ‘단순한 열정’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아니 에르고를 알게 된다. 당시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필립 빌랭은, 글솜씨가 꽤나 뛰어나서 그 필력으로 러브레터로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스스로 표현하긴 했지만) 한다. 눈에 띄는 여학생에게 편지로 뜨거운 메시지를 보내고, 약속시간에 약속 장소 근처에 가서 그 학생이 오는지 확인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역시 이 시대에 태어난 여자였다면 빼어난 글솜씨로 내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가질 만도 하다.
쨌든 성장통을 겪는 남자들이 어린 사랑을 해보고자 한때 어설픈 추파를 던지듯, 러브레터를 쓰는 유치한 행위를 이어갔는데 그 짓(?)을 아니 에르고에게도 행했고 그 편지가 먹혀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작가니깐 글솜씨를 알아본 것일까) 만나게 된 두 사람에게 스파크가 튀어 특별한 교제가 시작된다.
글을 읽다보면 필립 빌랭의 가정은 평탄치 않다. 그의 부모는 진작 헤어졌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잊지 못하며 끝없이 어머니에게 구애한다. 필립 빌랭은 그러한 아버지를 굉장히 한심해 하고 귀찮게 여긴다. 여느 자식이 부모에게 느낄 법한 권태로움과 짜증을 보인다.
아버지는 내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가끔 채 이 분이 지나지 않아 방에서 나와 내 곁에 앉앗다. 아무 말 없이 텔레비전을 켰지만 골똘하게 딴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릭 위해 내가 방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문 밖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어제 저녁 당신에게 전화 했는데... 집에 없더군.” 혹은 “게속 통화중이었어” 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질투심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은 어머니를 아직껏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매일 어머니를 짓누르는 무언의 박해가 필연적으로 자기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과거에 그가 보여준 집착이 결국 이혼의 원인이 되었음은 추호도 의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랑의 기교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혼신을 내던졌고 자기 주변에 대한 어떤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에게 사랑이란 극단적 투명성이고, 총체적이며 경악할 만한 자기 헌신이었다.
본문 13p
하지만 에르고와의 연애에서 필립은 아버지와 똑같은 포지션이 된다. 과거의 남자에게 질투하고 그녀의 생활에 집착한다. 어쩔수 없다. 부모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한 여성을 성숙하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는 사랑을 한다기보다 연애 과정이 자기확신을 갖기 위한 투쟁으로 읽히기도 했다. 게다가 집착하는 행동을 통해 자기 비난까지 일삼는다. 이쯤 되면 불편한 독자도 생기기 마련이다. 일기를 통해 꿰뚫어 보는 듯한 이 연애, 결국 엎어져야만 하는 진실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자서전을 읽으면 좋은 까닭은, 내 삶에서 깨닫지 못했던 문제를 타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를 증오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법이다. 그러므로 그 비난의 화살은 연애를 할 땐 애인에게 향하고,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 당시 놀랍게도, 필립이 무시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마음을 얻어 두 사람은 관계가 회복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필립은 또다시 어린아이같은 행동을 보인다. 부모의 행복을 빌어주기보다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 아버지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결핍을 채울 만한 존재를 끊임없이 찾는다. 그에게 성숙한 태도는 책에서 눈씻고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연애사를 돌이켜보았다. 내게도 뜨끔한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 쓸쓸한 과정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알몸을 본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 책, 어떤 식으로 상대를 사랑해야는지, 어떤 식으로 부모를 바라보아야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진 않는다. 다만 서투른 과정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주는 깨달음이 있다. 작가든, 독자든 누구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