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책리뷰] 영화를 만드는 여자 감독의 유쾌한 일상이 궁금하다면, 잘돼가? 무엇이든 - 이경미

잡풀 2020. 4. 29. 10:45

이경미 지음 이경아 그림 아르테 2018.07.19

 

이경미 감독을 떠올리면 '미스 홍당무'가 자동 연관으로 생각난다. 시뻘건 빛으로 스크린관을 가득 메우던 공효진의 얼굴, 그 후에도 <비밀은 없다> <페르소나> 처럼 그녀는 그녀만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냈다. 독특한 개성, 특이한 줄거리, 여성 주연. 그렇다. 내가 사랑했던 특징은 여성 주연 영화라는 것이다. 남성영화가 판치는 공간에서 여성 영화 감독으로 입지를 다지기란 꽤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내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이기에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도 고민없이 읽기 시작했다.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 소소하고 편안한 일상에서 영화인이 가질만한 생각들이 들어있다. 영화인은 아니지만 공감할 만한 부분도 많고 혼자인 여성으로 고민하는 부분도 비슷했다. 

 

대학 동창들이 연이어 결혼했다. 나는 독신인데 언제까지 남의 결혼식과 돌잔치에 돈봉투를 뿌려야 되느냐며 4년 전부터 영원한 불참을 선언했다. 사실은 그때 너무 참하기 싫고 축하해주기도 싫은 청첩장을 받았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홧김에 그런 선언을 했다가 이번에 다 무너졌다. 올 상반기에만 여섯 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래도 돌잔치는 영원히 안 갈 것이다. 

 

본문 84p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쓰다가 진짜 속에서 천불이 나오면서 이러다 죽나 싶어 홧김에 전화 상담 운세도 받아봤다. 전화상담 운세 역시 내가 평소 믿고 상담해온 모 감독의 어머니가 몇 년째 믿고 보는 곳이라고 추천해준 곳이다. 상담 예약을 해서 전화 통화에 성공했다. 생년월일, 생시, 이름을 준 뒤 계좌 이체부터 해야 한다. 그러면 10분 뒤에 도사님이 전화를 준다. 나더러 오페라를 하지 말고 팝페라를 해야 한다면서 어쩌구 저쩌구 한참을 얘기하는데 "우리 85년생 이경미 씨는..." 이러는 거다. "잠깐만요, 도사님! 저는 73년생인데?" 하니까 3초 침묵. "아... 내가 5분 뒤에 다시 전화를 하겠어요!" 하더니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러니깐 우리 73년생 이경미 씨는..." 좀 전과 똑같은 내용의 운세다. "아니, 잠깐만요. 85년생 이경미 씨랑 저랑 왜 똑같아요?" 물으니 "그러게. 사람 팔자가 차암 신기하죠?" 라며 오묘하게 대답하는데, 그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대화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이처럼 웃고 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가 꽤 많아서, 이경미 감독에 대한 이미지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위트있고, 생각보다 허당이시네! 나도 살면서 꽤나 사차원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지만,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사차원스럽다는 기분을 느낀 건 여러 번이었다. 어느정도 창작하는 사람이거나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에세이를 보면서 즐거할 수 있다.

 

남한텥 칭찬을 받으려는 생각 속에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혼자 의연히 선 사람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남의 비난에도 일일이 신경쓰지 않는다.

 

본문 132p

 

그러니깐, 유명인의 사주 팔자는 무조건 좋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사람들의 가벼운 예측일 뿐이다. 사주팔자는 사주팔자일 뿐이고 인생은 운명론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 묘하게도 이 부분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이경미 감독은 자신이 시나리오가 잘 쓰이지 않을 때, 자신의 영화가평가 입에 오르내릴때,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자신을 다독이던 메시지를 기록해놓았다.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법이라거나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혼자 잘 살아가는 방법 등을 그녀만의 경쾌한 어조로 담아놓았다. 

 

며칠 전, jtbc 대선 토론을 보았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어느 후보의 주장을 듣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 인성을 무너뜨릴 가치도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말자. 자... 심호흡을 하고 궁극의 휴머니즘을 떠올린다. 그리고 궁극의 고양이즘을 떠올린다. 아냐, 안돼 난데없이 돼지가 떠오른다. 안돼. 그러는 너는 돼지발정제를 가지고... 아아아. 니가 더 끔찍해. 우울하다. 안돼. 빙글빙글 춤을 춘다. 그러곤 머릿속으로 외친다. 

나는 조금 행복한 편이다. 그러니깐 오늘 낸 세금, 행복한 내일로 돌려줘! 제발 우리 모두에게 수치심을 되돌려줘!

 

본문 139p

 

독특한 발상, 의식의 흐름처럼 써놓은 에세이는 영화 감독의 이미지를 단번에 무너뜨린다.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대단한 사람들이 영화 감독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사람 사는 거, 잘난 감독이든 일반인이든 결국 똑같구나. 그렇게 출퇴근길에 누군가와 대화하는 느낌으로 읽을 만한 책 <잘돼가? 무엇이든> 영화인이 아니더라도 이입할 수 있는 대목도 많다.